신인 시절 황신혜씨 맡아 핑크 투명 메이크업 시도해 히트쳐

“제 필수 뷰티 아이템이요? 하트, 하트입니다. ”

조용하지만 확신에 찬 어조로 주저없이 대답하는 메이크업 아티스트 왕석구씨. 그의 대답은 공허한 수사가 아닌 삶을 지탱해 온 어떤 단단함처럼 느껴졌다. 우리나라 메이크업 아티스트 1세대로서, ‘최초’ 남성 메이크업 아티스트라는 이목과 책임을 이고 지고서, 20년 가까이 메이크업 아티스트로서 살아온 그의 이력이 수렴되는 지점은 바로 제품에 대한 사랑, 메이크업에 대한 열정이었던 것이다.

사실 처음부터 사랑이 싹튼 건 아니었다. 모든 사랑이 그러하듯, 우연과 필연과 인연이 겹쳐 오늘의 그를 있게 했다.

“83년 태평양에 입사해 미용연구실 색상디자인에 참여했습니다. 그때만해도 난 메이크업아티스트가 아니다 디자이너다란 자의식이 강했죠. 사측과도 그림 그리고 싶을 때 그리고 시간 되는 대로 디자인 일하란 얘기가 돼있었죠. ”

당시만 해도 여성들은 결혼이나 출산 때문에 회사를 그만 두는 경우가 많아 회사에서도 미대 출신 남자를 원하고 있던 차. 왕 씨도 부담없이 시작한 일인데 그가 도입한 메이크업 기법이 히트를 치면서 갑자기 ‘최초 남성 메이크업 아티스트’로 ‘뜬’ 것이다. 

"당시 태평양 모델이 금보라씨, 황신혜씨였어요. 전 신인이던 황신혜씨를 맡아 투명 메이크업을 시도했어요. 그때만해도 흑백 광고를 많이 하던 때라 흑백 사진에 어울리는 진한 화장을 더 많이 했거든요. 또 동양인에겐 핑크 색이 안 어울린다고 단정하는 분위기였죠. 저야 미대 출신이니 그런 룰에 상관없이 제 생각대로 핑크를 이용해 투명 메이크업을 한 건데 반향이 대단했죠.”

투명 메이크업 패턴은 소비자들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사람들은 황신혜의 화장을 누가 했는지 궁금해했다. 하지만 남자일 줄은 몰랐다. 언론에서는 ‘최초’ 남성 메이크업 아티스트라며 그를 취재해갔다.

“그야 말로 어느 날 자고 일어나 보니 유명해져 있었죠.”

왕석구씨는 그때를 떠올리며 웃음지었다. 하지만 어려움이 닥쳤다. 당장 집에서 난리가 난 것이다. 할 게 없어서 메이크업 아티스트냐는 반응이었다. 집에서는 그가 미대에 진학한 것도 못마땅해했고 은행원이 되길 바랐다. 집에다는 2년 정도 잠깐 하는 거라고 속였지만 자기 스스로 심적 갈등을 겪었다.

“안정된 삶과 불확실한 삶, 또 순수 예술가가 될 것이냐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될 것이냐 고민이 많았습니다. 당시 미용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나 대우가 낮았고, 사내에서도 메이크업아티스트에 대한 처우 조건을 어느 파트에 준해야 할지 모르는 상태였거든요.”

하지만 결심이 섰다. 자신이 만든 작품을 모든 여성들이 사용하고, 작품에 대해 그때그때 반응이 오는 게 좋았다. 혼자 창작하고 만족하는 것보다 현장에서 소비자들에게 트렌드를 제시하고 기쁨을 주고 많은 사람들이 내 작품을 선호하게 만드는 점이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그가 메이크업 아티스트를 평생 업으로서 받아들인 것이다.

그리고 93년 94년 그가 개발한 메이크업 제품들이 ‘대박’을 터뜨렸다. 당시 립스틱은 2-3만개만 팔아도 잘 팔렸다고 했다. 하지만 그가 개발한 밍크 브라운은 1백만 개를 팔았다. 94년 트로픽 오렌지도 220만 개가 팔렸다. 당시 블랙 마스카라도 만 개 정도만 팔렸는데 그가 기획한 청록색 마스카라는 30만 개가 판매됐다. 사람들은 그래서 그를 두고 메이크업 시장을 열었다고 말했다.

이렇듯 히트 작품을 낼 수 있었던 데는 데이터보다 ‘필(feel)’이, 통계보다 직관에서 더 영감을 받는다고 한다.

“어머니의 눈물이 그 속의 염분이나 수분 비율 등의 데이터만이 전부가 아니듯 여성의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트로픽 오렌지도 제로 베이스에서 만든 제품입니다. 당시 오렌지는 제일 안 팔리는 컬러였죠. 하지만 토털 패션과 매치가 잘 안 됐을 뿐 노란 피부에 오렌지는 잘 어울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

광고도 파격적으로 화장품 광고 사상 처음으로 권총이 등장. 이영애씨가 보디 가드로 나와 화제가 됐다.마침 ‘보디 가드’ 영화가 인기를 끌었고 영화 주제곡인 휘트니 휘스턴의 ‘I always love you’가 CM송이라 효과를 톡톡히 봤다.

밍크브라운의 경우도 당시 회색을 내기 위한 무기 색소는 사용감이 안 좋다는 이유에서 금기 컬러 중 하나였지만 침체된 경기 분위기를 반영, ‘필’에 의존해 선보여 히트쳤다는 설명이다.

메이크업 아티스트로서 높은 실험 정신과 프로의 면모를 지닌 그였지만 역시 최초의 ‘남성’ 메이크업 아티스트로선 풋풋하고 순수한 청년이었다. 갓 입사해서 만난 빅모델 금보라씨를 메이크업 하려면 무척 떨렸다고 고백했다. 그래서 가장 기억에 남는 태평양 뷰티 모델로는 역시 금보라, 황신혜를 꼽았다.

남성 메이크업 아티스트로서 불편한 점도 같은 이유에서다.

“촬영이나 쇼 무대 뒤는 굉장히 바쁘거든요. 모델들이 옷을 ‘훌렁훌렁’ 벗고 가슴이 보이고 하는데 적응이 안 되고 어쩔 줄 몰랐습니다.”

뿐만 아니라 동료나 선후배가 다 여자다 보니 외국 출장을 가서도 술동무도 없고 그렇다고 혼자 술 먹을 수도 없고 그냥 여자들 쇼핑하는 데 보디가드를 해주는 게 전부였던 시절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남성으로서 메이크업 아티스트는 여전히 매력적이라고. 여성이 못 보는 여성의 아름다움을 포착할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장점이라고 말했다.

현재 그는 무척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특히 해외 활동도 활발히 해 근자 들어 중국에서만 100여 차례 메이크업 쇼를 했다. 대학 강의도 내년까지 꽉 차 있고 각종 특강으로 쉴 틈이 없다.

“처음부터 돈 때문에 시작한 일이 아니니까요. 제품을 사랑하고 사람들에게 행복감을 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 이름을 건 브랜드를 출시, 돈을 버는 것보다 후학을 위한 일들에 더 관심이 많다. 앞으로 후배들에게 남은 기술을 체계적으로 전해줄 수 있도록 강의를 열심히 하는 것과 자기 경험을 살려 재밌 있게 풀어 쓴 한국 화장사를 집필하고 싶다는 바람이었다. 그것이 1세대로서의 책임이라고 믿고 있었다.

“후배들도 우리 것, 우리 화장법에 대한 관심과 공부를 늘린다면 더 파워풀한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될 수 있을 텐데요.”

애정어린 걱정도 잊지 않는 왕석구씨, 모든 것을 자신을 공으로 돌리지 않고 우연과 필연, 주위의 수고와 자신의 열정으로 담아 낼 줄 아는 그는 정말 메이크업 하티스트였다. <광고 사진 제공 : 태평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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