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의 동쪽을 지키는 동관왕묘...세계문화유산 등록 추진, 중국인 관광코스로 개발

한양의 동쪽을 지키는 동관왕묘

광해군 묘에 묘는 무덤을 말하지만 동묘의 묘는 신위를 모신 사당이다. 종묘와 같은 곳이다. 즉 동묘는 삼국지의 영웅 관우를 모신 사당이다.

▲ 정전은 工자 형태의 건물로 관우와 그의 아들인 관평 등 네 명의 무인상을 모시고 있다. 工자 건물은 두 건물을 하나로 붙여놓은 형상이다.

삼국지연의는 나관중이 쓴 것으로 위, 촉, 오의 삼국시대를 소재로 한 역사소설이다. 명나라 때 출간되어 지금까지도 대중들에게 사랑받는 소설이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왕과 신하들이 나라의 일을 토론하던 강연에 간혹 삼국지에 대해 말하는 부분이 나온다. 인물을 비교하며 말하는 것도 있으나 삼국지연의를 읽느라 유학공부를 소홀히 한다는 사람이 많다는 얘기도 자주 나온다. 그만큼 조선시대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었고, 관우는 역사적 인물을 넘어 숭배의 대상까지 되었다.

관우가 죽은 후 그의 고향에서는 관우를 숭배하는 민간신앙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한왕조의 정통성을 위해 목숨을 바친 충직함과 뛰어난 무공으로 그는 지역을 지켜주는 호국신이 되었다. 송나라에서는 그를 무안왕(무로 나라를 평안하게 했다)으로 봉하고 관왕묘를 건립하면서 신격화시켰다. 명나라 때는 협천대제로 승격되는 봉호가 내려지면서 도교의 신으로 모셔지게 되었다. 또 불교 사찰에서 성불했다는 전설로 그는 관제보살 또는 가람보살로 불법을 수호하는 신이 되었고, 그가 ‘춘추’를 애독했다고 해서 유교에서도 신으로 모셔지기도 했다. 관우는 시대가 거듭될수록 만능신, 재물의 신으로 더욱 확대되었다. 그 관성제군이 동요메 있는 것이다.

문화재급 유물 160여 점, 사도세자와 정조의 글씨 새긴 무안왕묘비

관우 사당이 생기게 된 것은 임진왜란에 참여한 명나라 장수들이 싸움신으로 숭배한 관우를 위해 사당을 지으면서부터였다. 명나라 황제인 신종이 4천 금을 보내 건립자금까지 지원했다. 관우 사당은 선조 31년(1598년) 남관왕묘를 시작으로 동묘, 북묘, 서묘가 세워져 한양 사방을 지키는 호위묘가 되었다. 조선 백성들이 그를 숭상하는 풍조도 생겨났다. 일제 강점기 때는 일제가 제사를 금지시키고 맥을 끊어 현재는 건물만 남아 있다.

지난 2014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었던 한국의 도교문화 전에 관우의 그림과 동묘에 있는 관우상이 전시되었다. 전시품은 수준이 아주 높아 조선중후기를 대표할만하다. 지금은 관우상을 보려면 문틈으로 살짝 보이는 것이 전부다. 그러나 안에는 문화재급 유물이 160여 점 있다. 관우상 등의 조각과 그림, 그리고 조선의 왕, 명나라 황제가 쓴 글과 현판이 전각 좌우로 무수히 많이 걸려 있다. 동묘는 역대 왕들이 동구릉에 가는 길에 친히 들렸던 곳이고 조선말기만 하더라도 나라에서 제사를 지내는 신성한 공간이었다. 최근 동묘를 조사하고 정비하여 세계문화유산 등록, 중국인 관광코스로 개발한다는 계획이 발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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